납읍 마을 북쪽 1796번지에 380평의 제주에서 제일 크고 깊은 봉천식수대지(奉天食水大池)로 수난의 곤경에서 극복하려는 선인들이 애써 이루어 놓은 역사의 발자취.
수갈(水渴)의 괴로움에서 소원을 이룬 사장물 시대의 발전과 지하수 개발로 부엌 식상(食床)에서 식수를 받아 먹는 오늘날 향민(鄕民)들이 원하던 영뢰평년(永賴平年) 희망의 꿈도 착정제갈(鑿井濟渴) 뜻깊은 노고의 대가도 백년이 아니되어 물허벅 진 어머니 아낙네들이 드나들던 길목은 허전하고 모진발길에 시들었던 잡초만은 무성한데 적막속의 고요한 물결엔 우리 선인들의 얼든 혼이 서려 있는 듯.
향민들이 고마운에 정표한 비석들은 어구에 서서 풍우 상설 마다않고 선인들이 거룩한 경적(經跡)의 정서를 전해 주고 있다.
우리 마을은 주변외곽이 능선으로 둘러 있어서 병아리 알 깨우는 닭 텅에 모양과 같아 으레 생수가 있을 것 같으나 집(볏대) 방석에 은(銀) 바위라는 풍설도 있듯이 시냇물도 지하수도 없어서 모퉁이 마다 샘을 파서 봉천수로 식수와 우마급수를 해왔다. 풍경이 아름답고 인정이 좋아서인지 타리(他里)에서 들어오는 사람들도 많아져서 18·9세기경에 이르러서는 더욱 인구가 증가하여 300여호 1,500여명에 달하고 축산도 번성하여 한기(旱期)가 좀 길어지면 물허벅 진 부녀들이 곽지, 애월, 하가연못 등지로 때로는 우마급수까지도 병행하여 다녔으니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 흙냄새 풍기는 샘물도 한발 앞다투어야 차지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던중 1917년 봄 전남 진도인 유명한 지사(地師) 한수태(韓水泰)가 이웃마을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주민들은 총회에서 결의하고 이를 초빙하여 식수천지(食水泉地)를 택정(擇定)키로 한 마을 유지들은 숙의 끝에 명지사의 실력을 확인하여 본 후 의탁하였다.
한지사는 과오름과 미니동산 등 각 요지들을 수차 관찰한 후 여기에 점지하면서 얼마간 깊이를 파면 지하생수가 용출될 것이라 함으로 이를 믿은 주민들은 부푼 기대속에 곧 동원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2m 깊이쯤 파내리다 인력으로는 불가능한 넓은 암반층이 나오므로 관청에 폭파허가를 얻고자 하였으나 일제 합병 직후라 불허함으로 부득이 실망과 함께 작업은 중단하고 말았다. 날로 늘어나는 인구에 모자라는 식수사정은 역비례였다. 얼마나 물이 귀했는지 식수감독을 두어 호당 식구비례로 몇 허벅씩 배급하였을때도 있었다고 한다.
어간 얼마를 흘렀을까 1937년 재일본 청년회에서 성금 얼마를 보내오자 향의(鄕議) 끝에 서쪽마을 문직이(門直伊) 축성(築城)에 일부를 사용하고 또 우마 급수장과 식수지를 증석키로 하여 중앙(큰거리)에 있는 작은 못들을 합치고 또 전토(田土)를 매입하여 구장 김종홍(金鍾洪)의 지도와 김중선(金重善)이 감독하에 오늘의 우마급수장과 남녀목욕지 그리고 정사각형인 170여평의 예술적 특수 축조공사(築造工事)로 수도를 가설하는 등 현대식 모범적 식수원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물로는 절대 부족할 형편이었고 공사를 중단한 장소에는 항상 물이 고이었다.
생수를 그리워 하는 주민들이라 원을 풀겸 향의 끝에 재기의 공사를 하고자 20년 후인 1930년 봄에 구장 유홍식(兪弘植)과 고인홍(高仁弘)이 주관하여 새로운 재기의 계획을 수립하고 지주와 교섭하여 매입하기로 하였으나 자금이 없어 망설이던 중 곽지인 김태경(金泰景)이가 실정을 탐지하고 선대가 살던 혈연지정(血緣之情)에 감회하여 당시 부지(敷地. 240평) 상당가 금 250원을 희사함으로 지주인 김용수(金龍壽)도 이에 통감하여 부지 전부를 기증함으로 힘을 얻은 주민들은 김중선을 감독으로 재공사를 시작하였다.
주업이 농축업이라 분주한 농번기는 피하고 매일 동서동 또는 육개동별 윤번제로 동원하여 흙을 곡괭이나 삽으로 파고 암반은 화약폭파나 돌끌로 버르며 산태(들것)나 등짐으로 나르고 강우시에 고인물도 퍼내어야 하는 이중고의 난공사임에도 굳은 신념과 단합된 인내심으로 몇 달 몇 일을 하였을까.
10여m 이상의 깊이를 파내려가자 또 넓은 암반층이 나왔다. 일을 할수록 산넘어 태산이요 물건너 바다라 아득하게만 여기어졌다.
고달프고 지친 주민들이라 인력도 한계가 있고 또 암반을 제거하면 꼭 생수가 날까 말까 하는 반신반의심과 고인물도 아니 고일까 하는 두려운 생각에 실로 진퇴양난이었다. 총의에 종결하기로 의결하므로 재기한지 3년 착공한지 20여년 반세기동안 사연도 많고 시련도 많았던 공사가 1940년 봄에 소태우리 말태우리로 밑바닥을 견고하게 다짐으로서 끝을 맺었고 한지사의 말대로 깊이 파지 못하여 갈망하던 지하생수는 제주에서 으뜸가는 넓고 깊은 흙 냄새 풍기는 봉천수로 대용하게 되었다.
공도 들고 땀도 흘리고 손발이 부르트고, 공든 탑이 무너질까 물도 맑고 맛도 좋고 마을의 큰거리에 있는 정사각형 샘과 대조적으로 동그란형으로 예술적인 계획과 줄기찬 노력으로 납읍주민들의 숙원이던 식수대천(食水大泉)이요 슬기로운 리민상을 돋보일 수 있는 오늘의 사장물이라.
선대가 공들여 물려준 보존적 가치관을 지닌 유적으로써 보호적 차원에서 늘 뒤돌아 보고 있는 오늘날 정다운 소슬바람에 일깨워지는 잔잔한 물결엔 잠든 선인들이 피땀흘린 정기와 얼이 스미치는 운율이 드리어지고 있으니 이의허전택급일향(以義許田擇汲一鄕) 성자의 도량(度諒)에도 요원한 빛이 되리라.
◈ 사장물이라 호칭하게 된 사유
옛 선조들이 사궁병법(射弓兵法)을 연마하던 사궁장(射弓場)이 서쪽 약 100m 거리에 있어서 그 일대를 속칭 ‘사장(射場)’이라 함으로 ‘사장물’이라 함.